[스파이의 세계] (5) 레전드로 적국을 기만하는 비밀정보요원
민진규 대기자
2018-10-29 오전 9:18:16


1943년 4월 영국 정보기관인 MI6는 ‘민스미트공작(Mincemeat Operation)’ 이라는 비밀공작을 단행한다. 연합군이 이탈리아의 시실리로 상륙하는 것을 숨기기 위한 목적이었다. 비밀공작은 수행하기가 어렵지만 성공했을 경우에 효과는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는 공작이라 소개한다.

2차대전 초기만 하더라도 독일군은 파죽지세로 유럽 전역을 점령하고, 아프리카 북부의 유전지대까지 장악했다. 하지만 북아프리카에서 ‘사막의 여우’로 불렸던 독일 장군 롬멜의 전차부대가 타격을 받은 이후 유럽대륙으로 전선을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유럽대륙은 독일의 육군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어서 연합국은 공격지점을 찾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의 정보기관은 독일의 정보기관을 기만해 유럽대륙에 군대를 상륙시키려고 민스민트공작을 실행하게 된다.

민스민트(mincemeat)는 ‘다진 고기에 사과, 건포도, 향료 등을 섞은 것’을 말하며 파이 속에 집어 넣어 요리한다. 민스민트공작의 핵심은 죽은 비밀공작원이 소지한 문서를 믿도록 만드는 것이다.

비밀공작원의 경력을 날조하는 것을 전문용어로 ‘레전드(legend)’, 즉 전설이라고 한다. 영국 최고 정보기관인 MI6 가 민스민트공작에서 죽은 군인의 레전드를 만든 과정과 실제 효과를 차례대로 살펴보자. 

◈ 아군을 속일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해야 레전드도 먹혀

민스민트공작에 동원된 인물은 영국 해병대 소령인 ‘윌리암 마틴(William Martin)’이다. 마틴은 북아프리카에서 작전 중인 영국 장군에서 보내는 비밀문서를 휴대하고 항공기로 가던 중 스페인 해안에서 항공기가 추락해 사망한다.

사망한 마틴 소령의 시신은 파도에 떠밀려 스페인 남부 해안에 도착했고, 어부가 시신을 발견해 정부에 신고한다. 당시 스페인은 중립적인 위치에 있었지만 독일 나찌 정부와 협력하고 관계를 유지해 마틴 소령의 몸에서 나온 비밀문서의 복사본을 만들어 독일 정보기관인 아프베르(Abwehr)에 제공했다.

비밀문서의 내용은 영국 장군 2명이 연합국이 유럽대륙으로 진격하기 위해 상륙할 장소가 그리스와 이탈리아 서쪽의 사르디니아이며, 이탈리아 남쪽 섬인 시실리는 위장된 타겟이라고 설명하는 것이었다.

독일 정보기관은 이미 영국에 광범위한 정보망을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비밀문서의 내용을 믿지 않았다. 영국 정보기관도 독일이 런던에서 암약하고 있는 스파이를 통해 마틴 소령의 신원이나 행적을 자세하게 확인할 것이라는 점을 파악해 레전드를 조작했다.

마틴이라는 이름을 선택한 이유는 해병대에 소령 계급으로 마틴의 성을 가진 군인이 여러 명이었기 때문이다. 해군 정보부서도 그의 죽음과 공식적인 임무에 대한 자료를 조작하기 쉬웠다.

마틴의 신원을 확실하게 만들기 위해 그의 약혼녀인 팜(Pam)의 사진도 지갑에 넣었다. 팜은 당시 정보기관인 MI5의 실제 직원인 낸시 진 레슬리(Nancy Jean Leslie)의 사진이 둔갑한 이름이었다. 2개의 연애편지도 함께 주머니에 넣었다.

런던 시내 보석점에서 53파운드를 지불하고 다이아몬드 약혼반지를 구매한 영수증, 가공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편지 등도 동봉했다. 아버지의 편지에는 집사 변호사가 로이드은행에서 79파운드를 추가로 인출해 반납해야 한다고 통보했다는 메모 내용도 포함됐다.

시체가 오랫동안 물에 잠겨 있어서 발견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물속에서 편지의 글자가 지워지지 않도록 오랫동안 유지되는 잉크를 제작하기 위해 과학자들도 동원됐다. 우표 책, 은제 십자가, 담배, 성냥, 연필, 열쇠, 새로운 셔츠 구입 영수증 등도 포함됐다.

최근까지 마틴 소령이 런던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런던 극장의 티켓, 해군 클럽에서는 4박한 숙박료 지불 영수증 등이 추가됐다.  1943년 4월 18일부터 24일까지 런던에서 활동한 일정을 증명할 다양한 서류를 만든 것이다.

신분증의 사진에 나타난 유니폼도 최신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것으로 교체했다. 시체의 의복이나 속옷도 계속 입었던 것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다른 사람이 입던 것을 구했다. 완벽하게 위장한 시체를 HMS Seraph 잠수함에 싣고 스페인 남부 해안으로 이동한 후 흘려 보냈다.

시체의 방류시간은 해류의 흐름, 주변의 기상, 어부들의 활동시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자연스럽게 빨리 발견될 수 있도록 고려했다. 계획대로 스페인 어부가 쉽게 발견해 당국에 신고했고, 스페인 정부는 영국 정보기관이 의도한 대로 독일에 비밀문서의 내용을 전달했다.

독일은 이후에 다양한 채널을 통해 마틴 소령의 신원이나 편지의 내용을 확인했고, 진짜 인물로 오인했다. 아군도 속일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한 영국 정보기관의 레전드에 완벽하게 속아 넘어간 것이다. 하지만 가짜 서류를 믿고 상황을 오판한 결과는 승승장구하던 히틀러의 군대를 수세로 몰리게 만들었다. 

◈ 비밀문서를 오판한 히틀러는 패망을 재촉해

1943년 5월 14일 독일은 이탈리아 무솔리니와 영국의 상륙지점에 대해 토론했지만 무솔리니는 비밀문서의 내용과 반대로 시실리가 상륙지점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히틀러는 그리스, 이탈리아 서부의 사르디니아, 프랑스령의 코르시카가 될 것이라며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상륙을 저지하라고 요구한다.

독일의 1사단은 프랑스에서 그리스의 살로니카로 이동했다. 불과 1개월도 되기 전인 6월말까지 사르디니아에 주둔한 독일군은 1만명으로 2배로 늘어났다. 2개 사단도 동부 전선에서 그리스가 위치한 발칸반도로 이동했다.

독일 구축함도 이탈리아 시실리에서 그리스 섬으로 이동했다. 독일의 7개 사단이 그리스로 이동해 8개 사단이 배치됐다. 10개 사단은 발칸반도로 이동해 발칸반도에 주둔한 사단도 18개로 늘어났다.

1943년 7월 9일 시실리를 연합군이 공격한지 4시간이 지난 후에도 시실리에 배치된 독일 공군 전투기 21대가 사르디나를 지원하기 위해 출격했다. 히틀러는 시실리가 점령된 이후에도 연합군이 그리스로 상륙할 것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의심이 많은 히틀러는 마틴 소령이 소지한 비밀문서를 믿었기 때문에 연합군이 그리스를 공격하기 위해 시실리를 공격하는 것처럼 위장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시실리에 상륙한 연합군은 이탈리아 반도로 북상해 유럽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독일은 가장 강력한 우군인 이탈리아를 잃고 전선을 점점 뒤로 물릴 수 밖에 없었다. 연합군이 이탈리아를 점령한 이후에서야 마틴 소령의 비밀문서가 가짜라는 사실을 파악했지만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뒤바꾸기에는 늦어버렸다.

유능한 첩보원 1명은 군인 10만명의 목숨을 살릴 수도 있으며 전쟁의 흐름을 바꿀 수도 있다. 러시아 역사상 가장 뛰어난 첩보원으로 불리는 리차드 조르게는 일본군이 소련을 침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정보로 독일군의 침공으로 풍전등화에 처해진 레닌그라드를 구했다.

- 계 속 - 

 


▲영국의 Mincemeat Operation 자료(출처 : MI6) 

민진규 <국가정보전략연구소장> stmi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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